나는 타인의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다. 특히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 자신을 정의하는 특성이 강한 동양 문화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타인의 시선과 평가를 의식하고 이에 따라 자신의 가치를 결정하는 실수를 흔히들 저지르고는 한다.
필자 또한 지난 30여년 간 대한민국이라는 동아시아 국가의 문화 속에서 살아온 한 명의 인간인 만큼 이러한 관념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타인의 평가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이에 흔들리는 상황을 경험하고는 한다.
물론 우리는 대부분의 인생을 어떠한 집단 속에 속해서 살아가게 되니 이러한 평가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비단 필자와 같은 직장인이 아닌 프리랜서라고 해도 본인이 일하는 업계라는 집단의 평가를 받을 수 있으며, 자영업을 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특정 플랫폼 내에서의 리뷰나 동네의 로컬 네트워크 내에서의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너무 이러한 평가들에 휘둘려 살게되면 진정한 나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는 일이 발생한다. 특히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더더욱 이런 상황에 휩쓸리기 쉬운데, 어차피 타인의 평가는 매우 주관적이라 모두의 입맛에 맞추기란 굉장히 어렵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다면 이순신 장군 정도의 위인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필자는 온전히 “나”라는 주체의 자존감과 신념을 지켜내야만 자신의 자아정체성을 확립하고 자아실현의 단계까지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만약 나의 가치를 타인의 주관적 잣대에 의존하게 된다면 성숙한 자아를 유지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결국 내 가치는 내 이성이 결정하는 것이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필자가 타인의 평가 속에서 겪었던 어려움과 이를 이겨내려고 노력하고 있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타인의 평가에 대한 부담
먼저 필자가 타인의 평가를 신경썼던 경우들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보려고 한다. 이 중에서는 아마 독자 여러분이 공감하실만한 내용도, 필자만이 경험했던 특수한 상황도 있겠지만, 아마 누구나 한번 쯤은 타인의 평가에서부터 출발한 고민을 해보았으리라 생각한다.
넓어진 책임만큼 다양한 이들의 평가를 받는 상황
필자의 최근 커리어는 IC(Individual Contributor)가 아닌 조직을 이끄는 리더의 역할이었다. 리더라는 역할은 다른 사람들에게 방향성을 제시하고 공감시켜 움직이게 만듦으로써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역설적으로 이렇게 넓어진 책임만큼 IC일 때에 비해 더 다양한 이들에게 다양한 시각의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역할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리더의 의사결정들은 조직 내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게 되기도 하고, 평소 접하는 이해관계자 자체가 IC에 비해서 많기도 하다. 즉, 리더는 의사결정의 영향력이 IC에 비해 큰 만큼 주로 직접적으로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평가를 받게되는 IC와 달리 조직 전체에 속해있는 사람들에게서 비롯된 다양한 평가를 받게 된다.
이런 부담을 생각해보면 리더를 한다는 게 좋기만 한 것도 아닌 것 같다.
그런 이유로 인해 필자 또한 IC로 일할 때보다는 상대적으로 다양한 사람들에게 다양한 평가를 받는 환경에 노출되게 되었고, 아무래도 자연스럽게 이런 평가들에 대해 신경을 쓰게 되기 쉬운 환경에 노출되었다.
여기서 재밌는 점은 이러한 평가들이 꽤나 주관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리더가 A라는 방향성을 제시했을 때 이 방향성이나 가치관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잘 하고 있는 것 같다”라고 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저런 식으로 하면 안될 것 같다”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물론 리더도 결국 한 명의 인간이니 리더의 의사결정들 또한 개인의 주관, 가치관, 경험, 인지한 정보 등에서 발현된 직관에 의해 진행된다. 정량적 데이터를 참고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좋겠지만 데이터 자체가 정답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니 이를 해석해서 진행하는 의사결정은 결국 인간의 직관에서 비롯된다. 즉, 리더는 늘 정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닌 본인의 기준에 따라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방향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리더의 의사결정에 대한 평가들도 각 평가자의 주관에서 비롯된 기준에 의해 진행된다. 같은 현상을 보더라도 이 현상에 대한 평가는 이를 평가하는 인간 객체마다 각각 다를 수 있으며, 심지어 평가자의 중립성 또는 내향성이 강하다면 조직 내 다수의 의견이나 자신이 신뢰하는 다른 인간 객체의 의견에 편승하여 평가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평가 대상이 OKR, NSM, KPI와 같이 정량적인 목표 달성 여부라면 주관성이 포함되어있지 않은 평가를 할 수 있겠지만,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때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제시된 방향성 또는 조직 문화와 같이 정량적 목표를 잡기 어려운 미션에 대해서는 성공/실패와 같은 이분법적 사고를 할 수가 없으니 결국 주관적인 요소들이 평가의 근거가 되기 쉬운 것이다.
정리하자면 현실적으로 리더의 가치관은 모두의 공감을 받기 어려울 수도 있으며, 생각보다 이러한 의사결정이나 가치관에 대한 평가는 그것 자체보다는 오히려 리더라는 인간에 대한 평가, 즉 호감도나 신뢰 자산과 같은 요소들이 더 큰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조직 전체가 추구하는 공통적인 가치가 부재한 경우라면 더더욱 그렇다.
"ㅌㅅ"의 원문은 토스였는데, 이 조직에 토스를 경험하고 온 개발자는 필자 뿐이었다.
예를 들어 “일을 못하는 사람은 회사에서 해고 당하고 일을 잘하는 사람은 그에 걸맞는 보상을 받아야 한다”라는 가치관을 가진 리더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누군가는 이 리더의 생각에 대해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에서 그건 당연한 것 아니야?”라고 평가할 수 있는 반면, 누군가는 “그래도 회사는 우리가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곳인데, 너무 차가운 것 같아”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이러한 가치들에 대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사실 의미가 없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에는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각자가 옳다고 믿는 방향성을 외칠 뿐이다.
여러 정당이 외치는 이념 중 어떤 것이 정답인가?
정답은 없다. 그저 각자의 이익을 위해 혹은 국가의 이익을 위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을 주장할 뿐이다.
하지만 결국 리더라는 역할을 맡은 사람은 자신의 가치관에 의거하여 조직에 가장 큰 임팩트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특정한 방향성을 제시해야만 한다. 아무리 다양성을 중시하는 조직이라도 기초가 되는 방향성조차 없다면 그저 각자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외치고만 있는 혼란스러운 상황이 되어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더는 팀원들을 공감시킬 수 있는 미션, 즉 최소한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이를 공감시킨 후 미션을 달성하기 위한 다양한 의견을 받아들이는 등 집단지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향성과 다양성 간의 적절한 밸런스를 잡아야 한다.
아마 필자가 제시했던 방향성도 그저 이런 수많은 방향성 중 하나였을테니 당연히 이 방향성에 대해 조직 내부에 있는 수많은 인간 객체들은 각자 저마다의 주관적 기준과 가치관에 의거하여 필자에 대한 평가를 했을 것이다.
이렇게 필자를 평가하는 사람 자체도 많아지고 필자에 대한 각자의 기대치나 평가가 갈리는 환경에 노출되다보니 아무래도 예전에 비하면 이러한 평가들에 대해 신경을 쓰게 되기 쉬운 환경이었던 것 같다.
블로그로 인한 긍정적 평가와 선입견
2017년 필자가 이 블로그를 처음 시작했을 때, 필자는 그저 글 쓰는 행위를 취미로 즐기는 평범한 한 명의 개발자였다. 물론 2023년 현재도 평범한 개발자인 것은 변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오랜 기간 글을 써온 만큼 일상생활 속에서도 필자를 알아봐주시고 필자가 작성한 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시거나 심지어 팬이라고 해주시는 분들도 생겼다.
아마 필자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실제로 필자와 함께 일해보거나 일상을 보내본 분들보다는 필자의 글을 통해서 필자를 알게 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이렇게 블로그를 통해 필자를 먼저 알게 되시는 분들은 필자가 굉장히 진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이는 아마 글이라는 매체와 필자의 필체 특성 상 감정이 크게 드러나지 않는 것, 그리고 필자가 작성하는 글의 주제들이 주로 학술적인 이야기나 필자의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다루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물론 그런 모습도 필자의 일부이긴 하겠지만 실제 현실에 존재하는 필자는 그렇게 진지하기만 한 사람도 아니거니와 오히려 돈, 명예, 학벌, 스펙과 같이 사회가 제시하는 공통적 가치보다는 그냥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사는 사람에 가깝다.
필자도 그냥 남들처럼 저녁에 친구랑 게임하는 것 좋아하는 평범한 30대 남자다.
물론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와 선입견들이 분명 필자의 인생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며, 실제로 이러한 평가들로 인해 이직, 오퍼 등 커리어에 대한 좋은 기회나 부업에 대한 기회도 많이 제안받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가 항상 좋은 점만 가져다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필자의 경우 이러한 긍정적 선입견들로 인해 꽤나 많은 고민들을 했었다.
필자는 지금까지 개발자로 일을 해오며 스스로가 훌륭한 개발자라고 생각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당연히 필자는 절대 완벽한 인간이 아니며 아직 부족한 점도 많고 실제로 필자의 역량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만나 실패한 경험도 많다.
또한 필자 주변을 보면 워낙 훌륭하신 분들이 많기도 해서 필자는 지금도 스스로를 그냥 강남이나 판교에 굴러다니는 평범한 개발자 정도의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터넷을 벗어나 일상 속에서 사람들을 만나다보면 간혹 이러한 이야기들을 듣게 된다.
“저도 동욱님 같은 개발자가 되고 싶어요.”
“우와 연예인 보는 것 같아요.”
“동욱님 정도면 먹고 살 걱정은 없지 않아요?”
“동욱님은 회사도 원하는 곳으로 골라서 가실 수 있지 않아요?”
물론 이러한 말씀을 해주신 분들은 필자의 글을 사랑해주시고 공감해주시는 독자님들이시고 필자를 응원해주시는 분들이니, 이는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다. 누군가가 나의 생각과 가치관에 공감해주고 응원해준다는 것은 너무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을 듣다보면 감사하다는 마음과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현실의 필자는 무슨 경제적 자유를 이룬 사람도 아니고 연예인도 아닌 그저 이런저런 고민이 많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한 명의 평범한 개발자일 뿐이다.
하지만 앞서 여러 번 이야기 했듯 평가라는 행위는 평가자의 주관적 기준에 의해 수행되며, 당연히 블로그를 통해 필자를 처음 접한 분들은 실제로 필자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역량을 지녔는지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없으니 그저 블로그 포스팅이나 깃허브에 올려둔 코드와 같이 본인들이 접한 표면적인 정보를 토대로 필자를 평가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필자 입장에서는 이 평가가 도대체 어디까지 올려쳐진 상태인지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필자도 사람인지라 누군가가 필자에게 기대를 한다면 이 기대에 부응하고 실망시키지 않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기 마련인데, 만약 필자의 실제 역량보다 타인의 평가가 매우 높게 형성된 상태라면 이를 만족시키기 쉽지 않을테니 이런 심리가 결국 부담으로 돌아오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때 누군가가 필자를 알아보거나 긍정적인 평가를 해주시는 상황이라면, 이 평가들에 부응하기 위해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언행도 주의하는 등 타인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는 상태가 되었었다. (쉽게 말해 그냥 연예인 병이다)
삶의 주인으로 살아라
사실 긍정적인 평가든 부정적인 평가든 이렇게 타인의 평가에 집중해서 살아가는 삶은 스스로에게 꽤나 큰 스트레스가 된다. 물론 사람에 따라 타인의 인정으로부터 충족감을 얻는 경우가 있기도 하겠지만, 근본적으로 타인의 마음이란 내 통제 영역 밖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타인의 평가에 너무 집중하다보면 나 자신의 가치관이 흔들리고 방향성을 잃게 되는 경우도 발생한다. 필자의 경우에도 이러한 평가에 과한 신경을 쏟다보니 지금까지 필자가 옳다고 믿어왔던 신념들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큰 스트레스를 받아 신체적인 영향까지 발생했었다.
사실 사회 생활을 하다보면, 그리고 경력을 쌓아가면 쌓아갈수록 내가 해왔던 일들로 인해 자연스레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된다. 이렇게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것은 나를 평가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것과 동일한 이야기이고, 이 과정 속에서 많은 이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을 수록 사회라는 거대한 조직 안에서 내 이익을 챙기기 수월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라는 사람에 대한 근본적인 가치 평가를 온전히 다른 이들에게 맡겨선 안 된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근본적으로 타인의 평가란 내 통제 영역 밖에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필자 또한 이러한 평가를 신경쓰게 될수록 스스로가 중심을 잃어간다는 생각을 했었고, 이를 벗어나 자유로워 질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을 오랜 시간 해왔다. 이 자유를 되찾기 위해 필자가 가장 먼저 했던 것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류하고 이를 인정한 후,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집착을 버리는 일이었다.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명확히 구분하자
세상을 살아가며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면 생각보다 내가 온전히 통제할 수 있는 것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내가 통제 가능한 부분은 대부분 나의 생각, 나의 감정과 같이 내가 주체가 되는 것들이며, 나를 벗어난 타인과 관련된 것들은 대부분 통제가 불가능한 영역에 위치한다.
통제가 불가능한 부분이 어디까지인지를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즉, 타인이 나에 대해서 평가하는 것은 나의 통제 영역을 벗어난 개념이다. 물론 타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그 사람을 설득하고 공감시키기 위한 행동을 하는 것은 통제 영역 안에 있지만, 그 행위에 대한 결과는 여전히 나의 통제 영역을 벗어나 있다.
서두에서 필자는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어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잃게 되기 쉽다고 이야기했다. 이는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그 마음이 타인의 평가라는 나의 통제 영역을 벗어난 개념에 대해 집착하는 형태로 나타나기 쉽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에는 굉장히 다양한 가치관과 이념을 가진 인간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으며, 이는 어떤 조직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같은 현상을 보더라도 이에 대한 평가나 감정은 각각의 인간 객체마다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이라면 왜 거기에 집착하는가? 내가 어떤 행동을 하던 나를 좋아할 사람은 좋아하고 싫어할 사람은 싫어하기 마련이다. 내가 절대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고자 발버둥치는 것만큼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일이 또 있을까?
필자는 인생의 Focus on Impact가 내가 통제 가능한 영역을 더 잘 해내기 위해 집중하는 것, 그리고 통제 불가능한 영역에 존재하는 것들을 가급적이면 통제 가능한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장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에 지나친 관심을 쏟는 것은 집중력이라는 한정된 자원을 의미없는 곳에 지출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한계를 인지하고 인정하는 행위는 결국 내가 아는 것이 무엇이고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고 하지 못 하는 것이 무엇인지 등을 스스로 인지하는 메타인지와도 연결된다. 통제 영역에 대한 인지 또한 “나”라는 주체가 세상에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이 어디까지인지에 대한 경계를 인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움직이는 것은 그대의 마음이다
어느 날 사찰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두 스님이 서로 논쟁을 했다. 한 스님은 “깃발이 움직이고 있다”라고 말하고, 다른 스님은 “바람이 움직인다”라고 주장했다. 서로의 주장만이 오갈 뿐 논쟁은 해결되지 않는다.
이때 육조 혜능은 말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을 뿐입니다.” 두 스님은 소스라치게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무문관> 29칙. 비풍 비번.
이 에피소드에서 혜능 스님은 어떤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본래 무문관이란 질문만 던져놓고 답을 제시하지는 않는 화두집이니 이 책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필자는 이 에피소드를 읽고 “현상은 그저 존재할 뿐, 그 현상을 해석하는 것은 인간의 주관적인 판단이다”라는 생각을 했었다.
대승 불교의 경전인 화엄경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핵심 사상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 말은 단어 그대로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다”라는 뜻이며, 필자는 내가 내 삶의 주인으로 살 수 있는 핵심 포인트가 바로 이 일체유심조라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타인의 평가로 인해 힘들어하는 상황은 좋은 평가를 받는 상황보다는 좋지 못한 평가를 받는 상황인 경우가 많으니, 누군가가 뒤에서 여러분에 대한 가십을 퍼트리고 다니는 상황을 한번 생각해보자.
아마도 그 가십은 100% 사실로만 이루어진 내용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여러 가십들이 그러하듯 약간의 사실과 그 사실에 대한 오해와 주관이 덧붙혀진 내용들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당사자에게 제대로 된 사실 관계를 확인하려고 하는 사람은 드물기도 하거니와 담백한 사실보다는 이런저런 거품이 붙어야 더 재미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여러분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여러분은 답답함, 억울함, 분노, 배신감과 같은 여러가지 감정에 휩싸이게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감정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누군가 뒤에서 나에 대한 가십을 퍼트리고 다닌다는 그 환경이나 상황에서 비롯된 것일까? 혹은 그 가십을 퍼트리고 다니는 인물에게서 비롯된 것일까?
아니다. 결국 답답함, 억울함, 분노, 배신감과 같은 감정은 내 마음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감정들은 결국 내 감정인 것이며, 앞서 이야기했듯이 내 감정은 내가 온전히 통제 가능한 영역 안에 있는 개념이다. 결국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과 관계없이 내가 스스로 이런 감정을 만들어내어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다는 말의 의미이다. 물론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 자체가 옳거나 옳지 않다는 가치 판단, 그리고 옳지 않다면 바로 잡아야하는 액션 아이템의 수립이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전략을 수립하고 행동을 수행하는 것과 내 감정은 별개의 문제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일체유심조라는 말은 어찌 보면 꽤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필자는 이 말이 수많은 평가와 비교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말이 아닐지 생각한다.
물론 누군가 나에 대한 가십을 퍼트리고 다닌다는 것이나 익명 뒤에 숨어서 비난을 하는 것이 감정적으로 힘들어지기 쉬운 상황인 것은 맞다. 하지만 내가 힘들어하든 힘들어하지않든 내가 이성적으로 이 현상의 원인에 대해서 고민하고 해결하기 위한 액션아이템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상황 자체는 개선되지 않을 것이다.
즉 조직 내에서 가십이 돌 정도로 건강하지 않은 조직의 현재 상태를 개선하는 것이 중요하지 내가 가십의 대상이 되었다는 그 상황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그냥 담백하게 그런 상황이 발생하게 된 원인에 대해서 고민하고, 만약 그 원인이 내 통제 가능한 영역 안에 있는 것이라면 빠른 액션아이템 수행을, 그리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이라면 통제 가능한 영역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만 고민하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일체유심조를 이해하고 내 감정을 온전히 통제 가능한 영역에 둘 수 있다면 주변에서 발생하는 현상을 관찰할 때 조금 더 문제의 본질에 대해 이성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얻을 수 있다.
이는 감정을 없애라는 것이 아니다. 주변에서 발생하는 상황이나 주어진 환경과 같은 외부 변수에 내 감정이 의존하게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주변 환경이 어떻든 내 감정은 내가 컨트롤하는 것이다. 주변 환경이나 상황에 관계없이 행복할 수도 불행할 수도 있는 것이다.
대부분은 양면적인 평가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평소 주변의 평가에 대해 신경을 쓰다 보면 아무래도 좋은 평가보다는 좋지 않은 평가에 더 집중하게 되기 쉽다. 인간은 부정적인 정보가 가져다주는 위협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에 일종의 부정성 편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신문이나 뉴스도 긍정적인 소식보다는 부정적인 소식이 더 잘 팔린다고 한다)
이때 만약 감정 컨트롤까지 능숙하지 않다면 “나는 안 될 거야”와 같은 자조적인 가치 절하와 함께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들 수도 있다. 게다가 내가 나에게 부정적인 피드백을 주는 구렁텅이로 한번 빠져들게 되면 스스로 헤어나오는 것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 특정 인간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 양면적이다. 즉 나에 대해 나쁘게만 평가하는 사람이나 좋게만 평가하는 사람보다는 대부분 좋은 점도 있고 부족한 점도 있다고 평가한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이는 당연한 사실인게,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강점과 약점이 존재하기 때문에 강점에 대해서는 좋은 평가를 받을 가능성이 높고 약점에 대해서는 좋지 못한 평가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행위자-관찰자 편향이나 자기 고양 편향으로 인해 자신에 비해 타인에게 더 엄격한 평가를 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성적인 성인이라면 특정 인물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중립적인 평가를 하기 마련이다. (특정 인물에 대해 좋지 않은 평가만 하는 사람이라면 특정 현상에 대해 다각적인 시각을 가지지 않은 사람일 가능성이 높으니 가급적 피하는 것을 추천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평가는 양면적이며 중립적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인지한다는 것은 나의 자존감을 지키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물론 반대로 너무 긍정적인 정보에만 집중하면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 할 수도 있으니 적절한 밸런스를 잡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물론 이것은 단순한 가정이 아니라 실제로 여러분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나 또한 중립적인 시각을 가지고 타인이 나에 대해 긍정적 평가를 한 부분에 있어서는 강화를, 부정적 평가를 한 부분에 있어서는 개선을 하는 것이다. 굳이 이런 평가들로 인해 기분이 나빠질 필요도 좋아질 필요도 없다. 앞서 이야기했듯 그저 이런 평가가 발생했다는 담백한 사실을 인지하고 강화하거나 개선하기 위한 액션 아이템을 수행하면 되는 것이다.
마치며
누구나 그러하듯이 필자 또한 지금까지 삶을 살아오며 수많은 평가를 마주할 수 있었다. 이는 비단 개발자로 일을 할 때 뿐만이 아니라 어릴 적 비보이, 사운드 엔지니어로 활동했을 때도 동일했었다.
아무리 관계를 중시하지 않는 인간이라고 해도 결국 사회라는 거대한 네트워크 내에서 알게 모르게 다른 인간들과 인터랙션을 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 과정 속에서 타인이 자연스레 나에 대한 평가를 한다는 사실 또한 너무나 당연한 현실일 것이다.
하지만 이 평가들에 너무 매몰되면 온전한 나 자신을 잃어버릴 수 있다. 물론 타인의 평가나 조언을 듣고 나의 가치관이나 삶의 방향성에 대한 수정이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이에 대한 결정 주체는 오롯이 나 자신이어야 하며, 이 결정 권한을 타인에게 위임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타인에게 하는 말이나 평가에는 어떠한 비용도 들지 않는다. 또한 타인은 나에 대해 평가를 할 수는 있지만 그 평가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즉, 그 행위를 함에 있어서 마치 10억이 넘는 아파트에 대한 구매 결정을 할 때와 비슷한 수준의 고민을 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니 필자는 그런 행위에 너무 무게를 두지 않는 것을 추천한다. 결국 내 가치는 내 이성이 결정하는 것이며, 올바른 자기 가치관을 가진 성인이라면 응당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인간의 사상과 가치관에는 정답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그저 그런 생각들이 존재할 뿐, 그 생각들에 대한 가치판단은 모두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스타트업에 다니는 것이 옳은 것인가? 대기업에 다니는 것이 옳은 것인가?”
“높은 소득과 워라밸을 맞바꾸는 것이 옳은 것인가? 돈보다는 내 시간을 챙기는 것이 옳은 것인가?”
“기회의 평등이 옳은 것인가? 결과의 평등이 옳은 것인가?”
이러한 이데올로기들에 대한 정답은 그 누구도 제시할 수 없다. 그저 자신이 믿는 가치에 따라 선택할 뿐이다.
그러니 정답을 찾으려 하거나 모두에게 사랑받으려고 하지 말고 자신이 믿는 신념에 따라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따라 자신만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걷자.
주변과 나를 비교하거나, 지나고 나면 별 것 아닌 상황에 감정을 이입하거나, 당장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기 위해 발버둥 쳐 나를 더 힘들게 하는 것도 결국은 나 자신이다.
나 자신을 온전히 통제하고 주변의 현상들을 이성적으로 관찰하다보면 사실 별 것 아닌 단순한 문제들을 때로는 너무 복잡하게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상으로 나는 타인의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포스팅을 마치며, 오늘도 인간들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하고 행복을 느끼고 상처를 받기도 하는 독자분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